[추리소설&영화] 데이비드 발다치<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 Memory Man> & 아가사 크리스티<거울 살인사건 The Mirror Crack’d> - 무심코 주고받게 되는 치명적인 상처들에 대해
1.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 Memory Man>
저자 : 데이비드 발다치(David Baldacci)
이 소설은 언젠가 ‘교보eBook’ 앱의 무료 서비스 리스트에 올라 있어서 읽게 된 작품이다. 생소한 작가고 상당히 장편이라서 끝까지 읽을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지만 무료라는 이유만으로 클릭했다. 작가 소개를 보니 그의 작품은 출간되는 족족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고 영화로도 많이 제작된 인기 작가였다. 읽어보니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범죄소설 작가’라는 평답게 흡입력이 대단했다. 덕분에 며칠 밤을 작은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며 지새워야 했다.
소설의 주인공은 전도유망한 미식축구 선수였으나 경기 도중에 일어난 사고로 뇌 손상을 입게 되고 그 후유증으로 무척 희귀한 과잉기억증후군을 갖게 된다. 사고 직후에는 뇌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고생하지만, 차차 안정을 찾게 되면서 과잉기억증후군을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새로운 직업 – 형사가 되어 많은 사건을 해결하며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근무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어느 날, 사랑하는 아내와 딸이 처참하게 살해당한 시신으로 변해 있는 모습을 발견하면서 사건은 시작된다.
추리소설답게 살인사건은 주인공의 가족으로만 끝나지 않고 연쇄적으로 발생하는데, 범인은 게임을 하듯 살인을 저지르며 주인공에게 노골적으로 원한이 있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주인공은 과잉기억증후군을 가졌음에도 도무지 자신에게 원한을 가질만한 사람이 누구인지 소설 후반부까지 기억해내지 못한다. 이 부분이 소설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다. 과잉기억증후군을 가진 사람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살인동기가 과연 무엇일까?
추리소설의 매력은 보통 기발한 트릭과 반전에서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 못지않게 살인동기도 매우 중요하다. 한 사람을 죽이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을 느끼게 되는 시점이 있다. 일반적인 살인사건에서 가장 큰 살인동기의 1순위는 ‘돈’이지만, 추리소설에서는 다양한 살인동기가 등장한다. 과연 이 소설의 살인동기가 언제쯤 밝혀질 것인가 두근거리며 정독했지만, 막상 밝혀지고 나니 기대한 만큼의 기발한 살인동기는 아닌 듯하여 조금 허탈했다. 하지만 과잉기억증후군임에도 기억 못할만큼 사소한 사건이어야 하므로 작가의 설정에는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2. <깨어진 거울 The Mirror Crack'd from Side to Side>
저자 : 아가사 크리스티(Agatha Christie)
추리소설의 여왕 아가사 크리스티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머니가 추리소설을 즐겨 읽는 취미를 가진 덕분에 어릴 때부터 집에 굴러다니던 추리소설을 많이 읽을 수 있었다. 주로 엘러리 퀸(Ellery Queen), 반 다인(Van Dine) 같은 고전 추리작가였는데 내 취향에는 아가사 크리스티의 작품이 맞았다. 아가사 크리스티는 여성작가 특유의 섬세한 감정 표현이 뛰어나다. 물론 기발한 트릭도 여느 작가에 뒤지지 않는다. 중학생 때 읽었던 그녀의 대표작 <애크로이드 살인사건(The Murder of Roger Ackroyd)>을 읽었을 때의 전율이 아직도 생생하다.
하지만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은 전무후무한 트릭 때문에 독자와 작가와의 공정한 추리게임이 아니었다는 비판도 많이 받은 작품이다. 이 작품 이후에 로널스 녹스(Ronald Knox)와 반 다인(Van Dine)은 독자와의 공정성을 지키기 위해 추리소설이 지켜야 할 법칙을 만들기도 했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작품은 영화나 드라마로 보는 것보다 책으로 읽는 편이 훨씬 흥미진진하다. 특히 <애크로이드 살인사건> 같은 경우는 반드시 책으로 읽어야만 트릭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녀의 작품 중에 영화로 보는 게 나은 작품이 있는데, 바로 <깨어진 거울(The Mirror Crack'd from Side to Side)>이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엘리자베스 테일러(Elizabeth Taylor)가 주연을 맡아 <거울 살인사건(The Mirror Crack’d, 1980)>이라는 제목의 영화로 제작되었다. 이 영화는 언젠가 KBS 명화극장 시간에 방영된 적이 있어서 우연히 볼 수 있었는데 영화의 여운이 많이 남아서 나중에 원작소설로도 직접 읽어보게 되었다.
영화의 백미는 바로 이 장면이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신비로운 보랏빛 눈으로 유명하다. 캡쳐한 화면과는 달리 영화에서는 그녀의 클로즈업된 두 눈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이 장면에서 베테랑 여배우의 진가가 드러난다. 그녀의 눈엔 놀라움, 허무함, 슬픔, 분노, 그리고 기쁨까지. 정말 다양한 감정이 동시에 나타난다.
소설(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어느 시골 마을에 있는 유명 여배우(엘리자베스 테일러)의 집에서 파티가 열리고, 파티 도중에 어떤 여자가 독이 든 칵테일을 마시고 죽으면서 사건이 시작된다. 역시 추리물답게 피살자는 한 명으로 끝나지 않고 연쇄살인 사건으로 이어진다. 마지막으로 여배우(엘리자베스 테일러)의 죽음으로 연쇄살인이 멈춘다. 그리고 아가사 크리스티 소설에서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 - 할머니 명탐정 미스 마플(Miss Jane Marple)이 이 살인사건의 범인을 밝혀낸다.
[스포일러] 여기서부터는 완벽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오래전 여배우는 임신 초기에 풍진에 걸려서 기형아를 출산한 가슴 아픈 사연이 있었다. 그런데 풍진을 옮긴 사람은 여배우의 열렬한 팬이었고, 그 팬은 여배우가 임신했을 때 풍진에 걸려 붉은 발진이 일어난 얼굴을 짙은 화장으로 교묘하게 가리고 찾아와서 사인을 받아 간 적이 있었다. 결국 여배우는 풍진을 무릅쓰고 자신을 만나러 왔던 열렬한 팬 때문에 임산부에게 특히 치명적인 풍진에 걸렸고, 병의 후유증으로 기형아를 낳아 평생을 고통받으며 살아야만 했다.
그런데 이 팬이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 파티에 참석하여 여배우에게 과거의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떠벌리고 만 것이다. 자기는 풍진을 무릅쓰고 당신을 만나러 올 만큼 열렬한 팬이었노라고.
그 이야기를 듣고 여배우가 놀란 눈으로 쳐다본 것은 벽에 걸려있던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가 그려진 성모자상이었다. 그녀는 지금껏 자기에게 풍진을 옮긴 사람에게 강한 원한을 품고 살아왔다. 그녀는 긴 세월이 흐른 다음에야 마침내 자신에게 평생 고통을 준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고, 어머니와 아기가 그려진 그림을 보면서 살아오면서 겪어왔던 고통을 떠올리며 살인을 결심한 것이다.
영화에서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눈빛은 드디어 풍진을 옮긴 범인을 알게 되었다는 놀라움과 허탈함, 이제껏 살아오면서 느껴야만 했던 슬픔, 평생 고통을 안겨 준 팬에 대한 분노, 마침내 복수할 수 있다는 기쁨, 살인을 하고야 말겠다는 단호한 결심과 섬뜩한 살기까지 동시에 드러나 있었다.
여배우는 그 여성 팬을 교묘하게 독살하고, 수사가 시작되자 자신의 범행이 드러나는 것을 막기 위해 증인이 될 만한 사람들까지 차례로 죽이게 된다. 하지만 좁혀오는 수사망을 견딜 수 없었는지 결국 자살을 선택한다.
이 작품은 살인의 트릭보다는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던 살인동기가 충격적이다. 여배우에게 풍진을 옮긴 팬은 악의도, 고의도 없었다. 여배우가 임신한 사실을 알 방법도 없었고 풍진 때문에 기형아를 낳은 여배우가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게 되리라는 생각은 전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Memory Man)>에서의 살인동기는 과잉기억증후군을 가진 사람조차도 간신히 기억해 낸 사소한 사건이었지만 <깨어진 거울(The Mirror Crack'd from Side to Side)>의 살인동기는 살인 피해자의 입장에서 도저히 생각해 낼 수 없는 사건이었다.
그런데, 살다 보면 이런 일들이 주변에서 꽤 흔하게 일어난다. 어떤 사람의 별 악의 없는 말 한마디나 무심코 했던 행동이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키는 경우가 있다. 말 한마디, 무심코 한 행동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평생 씻을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입기도 한다. 그리고……충분히 살인동기가 될 수도 있다.
나도 예전에 누구에게 강한 증오심과 살의를 품은 적이 있었다. 그와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다는 사실이 견디기 힘들고 괴로웠다. 나는 상상 속에서 그를 난도질하고, 불에 태우고, 갈아 마시고, 찢어발겼다. 그가 내 살의를 눈치챘을까? 나는 그렇지 않았을 거로 생각한다. 아마 내가 살의를 품은 이유를 말했어도 이해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누가 나에게 증오심을 드러내면 두렵다. 정말 위험한 감정이다. 사람의 두뇌 회로는 작동방식이 다 다르다. 내가 치명적인 어떤 부분을 건드릴 수 있다. 그리고 그게 살인으로 이어지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나도 거의 실행할 뻔했으니까.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기본적인 도리만 서로 지킨다면 이런 위험에 빠질 일은 없을 것이라 믿고 싶지만, 위 두 소설의 경우에서 보듯이 사람 일은 정말 알 수가 없다. 타인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으려 아무리 노력하며 살아도 나도 모르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때로는 받는 경우가 생긴다.
아마 그런 게 바로 '악연'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