힌지(hinge)는 문과 문틀 또는 상자와 뚜껑을 연결하는 경첩을 뜻한다. 언힌지드(Unhinged)는 그러한 연결 역할을 하는 경첩이 단단하게 고정되지 못하고 풀어지거나 떨어진 상태라는 의미이므로 ‘흐트러진’, ‘혼란한’, ‘불안한’, ‘위태로운’이라는 뜻으로 해석 가능하다. 스릴러 영화에 썩 잘 어울리는 제목이라 할 수 있다.
<언힌지드>는 로튼 토마토(Rotten tomato) 지수도 박하고 국내 네티즌과 평론가의 평점도 높지 않은 편이라 큰 기대를 하지 않고 봤는데 의외로 볼 만했다. 스릴러 영화로서 나쁘지 않다. 전형적인 스릴러 영화의 공식을 따르는 느낌이고 예측 가능한 전개로 흘러가는 탓에 반전이나 의외성 부분은 약한 편이지만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끝까지 치고 나가는 힘이 꽤 좋은 편이다.
영화를 볼 때는 배우의 매력도가 무척 중요하다. 등장인물 중 한 명이라도 감정 이입을 할 수 있는 매력적인 배우가 있다면 영화에 집중하기 쉬워진다. 멋진 외모나 뛰어난 연기력이 돋보이는 배우 자체의 매력일 수도 있고 배우가 연기한 역할에 대한 공감일 수도 있다. <언힌지드>에서는 러셀 크로우(Russell Crowe)에게 여러모로 감정 이입할 수 있어서 꽤 몰입하여 볼 수 있었다. 여주인공이 선사하는 고구마를 견딜 수 있다면 킬링타임용으로는 손색없는 영화인 듯하다.
[스포일러] 다음 내용부터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습니다.
[사회 문제를 소재로 다룬 스릴러] - 분노조절 장애 사회, 경찰력 부족, 그리고 자력 구제
<언힌지드>는 스릴러 영화 특유의 자극적인 오프닝 신이 지나간 다음에 본격적으로 오프닝 타이틀이 시작된다. 오프닝 타이틀에서는 사람들이 화를 참지 못하고 보복 운전 등의 폭력성을 드러내는 사건을 다룬 뉴스를 집중해서 보여준다.
영화는 일단 미국의 상황만을 다뤘지만 세계 여러 나라에서 분노조절 장애로 인해 발생하는 보복 운전은 공통적인 문제인 듯하다. 물론 한국도 마찬가지다. 운전대를 잡고 살면서 보복 운전을 한두 번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현대 사회의 사람들은 하루를 버텨내기가 녹록하지 않다. 삶은 팍팍하고 나를 압박하는 각종 스트레스는 넘쳐난다. 안정된 삶을 위협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밀려들어 나를 극한으로 몰아가면 엄청난 강철 멘탈을 지닌 사람이 아닌 한 사소한 문제에도 폭발하고 말 것이다.
그리고 <언힌지드>에서는 분노조절 장애로 인한 보복 운전 문제 외에도 미국 사회 특유의 문제점을 더 다루고 있다. 일단 부족한 경찰과 구급차 인력이다. 영화에서는 목숨을 노리는 사이코패스가 지척에 쫓아오지만 일단 대형 교통사고 현장에 인력을 먼저 배치하느라 피해자를 보호할 인력을 파견할 여력이 없다.
피해자는 결국 자력구제의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 이성을 상실하고 악에 받친 엄청난 거구의 사내와 맞붙어 완력 대결을 펼쳐야 하는 상황이 펼쳐진다. 법치주의가 살아있고 질서와 치안이 확립된 현대 문명국가에서는 엄연히 ‘자력구제 금지의 법칙’이 존재한다. 하지만 <언힌지드>가 보여주는 미국 사회는 그렇지 못한 것 같다. 하긴 미국은 서부 개척 시대 때부터 스스로 총기를 휴대하고 자력구제를 해왔던 전통이 있긴 하다.
<언힌지드>의 오프닝 신에는 영화가 다루고자 하는 미국 사회의 이러한 문제점이 고스란히 축약되어 있다.
[영화적 재미를 위한 설정과 개연성 사이에서 균형 잡기]
개연성을 충분히 갖춘 현실감 넘치는 영화가 있는 반면 우연의 남발과 비현실성으로 가득한 영화도 있다. 공감을 이끌어내려면 현실감 있는 영화가 좋겠지만 우연성 가득한 영화도 나름대로 극적인 재미가 있다. <언힌지드>는 후자다.
여주인공의 평소 행동이나 삶의 방식 등은 피해자로 만들기 위해 대놓고 조건을 짜맞춘 모양새다. 그 모든 조건들 중에 단 한 가지만 성립하지 않았어도 피해자가 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면 물론 영화 자체가 성립되지 않았겠지만. <언힌지드>는 살면서 사소한 우연이 모이고 쌓이면 어떤 나비 효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도 보여준다. 우연 남발의 현실감 부족한 영화로 몰아세울 수도 있겠으나 살다 보면 이런 식의 기막힌 우연의 결과가 꽤 일어나기도 한다. 영화적 설정을 위해 개연성이 부족해졌다고 폄하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데 여기서 조금 주의해야 할 점은 이 영화를 보면 피해자에게도 그런 일을 당한 책임을 지우고 싶어지는 생각이 살짝 든다는 거다. 멀쩡한 범죄자를 두고 그런 생각을 하는 건 물론 옳지 않다. 도둑맞은 피해자에게 왜 현관문을 잠그지 않았냐고 비난할 수는 없다.
어쨌든 살면서 범죄에 노출되지 않으려면 평소에 주의해야 할 점에 대해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교훈적인 효과도 있는 영화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여주인공 레이첼(Rachel)이 내 앞에 있다면 한가지 문제점만은 지적해주고 싶다.
“레이첼, 다른 건 모르겠고 늦잠 자는 습관만은 좀 고치렴.”
[출연배우]
러셀 크로우(Russell Crowe, 1964년생) – 톰 쿠퍼(Tom Cooper) 역
톰 쿠퍼(Tom Cooper)는 영화 <언힌지드>의 막가파 빌런(villain)이다. 엔딩 크레딧에서는 이름 대신에 간단하게 ‘Man(남자)’으로 나온다. 영화에서 톰 쿠퍼라는 이름이 쓰인 순간은 자신을 소개할 때 한 번뿐이다. 그런데 엔딩 크레딧에서 톰 쿠퍼라는 이름 대신에 굳이 ‘Man’으로 쓴 이유는 뭘까. 특정한 이름을 쓸 필요가 없는 역할이라는 의미일 수도 있고 본명이 아닐 지도 모르겠다. 앞뒤 안 가리고 막 나가는 판국에 굳이 가명을 쓸 것 같지는 않지만.
남자는 나름대로 사연이 많은 인물이다. 아내와는 이혼했고 직장에서는 밀려났다. 그것도 연금을 탈 수 있는 요건을 채우기 바로 직전에 잘렸다. 이혼 과정에서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듯하다. 그 때문인지 이혼 변호사에 대해 적대감이 가득하다. 게다가 새로 취직한 직장에서도 막 잘렸다. 마약성 진통제를 복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건강에도 심각한 문제가 있어 보인다.
그래서 남자는 화가 매우 많이 나 있다. 이미 첫 등장 신에서부터 살인과 방화를 저지른 상태라 이제는 거칠 것이 없다. 보통 사람의 삶에서 완전히 벗어나 막장 인생으로 들어선 그를 건드리는 건 폭탄의 스위치를 누르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 와중에 한 명이 걸려든다. 남자는 마지막 남은 분노마저 끌어모아 그의 심기를 거스른 자를 철저하게 응징한다.
대부분 사람들은 영화에서 빌런 역할보다는 피해자에 감정 이입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언힌지드>에서는 좀 다를 수 있을 것 같다. 남자를 둘러싼 여러 상황이 그의 분노 표출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남자는 물론 심각한 분노조절 장애이고 사회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범죄자이지만 그를 향해 어쩐지 안쓰러운 마음을 품게 된다. 배우 러셀 크로우(Russell Crowe)에 대한 팬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더욱 그럴 것 같다.
영화 <쓰리 데이즈(The Next Three Days), 2010년>에 출연할 때만 하더라도 조금 살이 오르긴 했지만 건장한 중년 남자의 모습이었던 러셀 크로우는 영화 <보이 이레이즈드(Boy Erased), 2018년>에서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이다.
<보이 이레이즈드>가 그의 최고 몸무게를 찍은 영화 출연작이 될 것이라는 생각은 <언힌지드>에서 가볍게 무너지고 만다. 게다가 수염까지 덥수룩한 탓에 전형적인 슈퍼 울트라 과체중 비만 체형 이미지가 되었다.
역할을 위해 살을 일부러 더 찌웠다는 얘기도 있다. 마치 스모 선수처럼 살이 붙으니까 확실히 힘이 더 세 보인다. 워낙 거구의 몸이라 웬만한 사람과의 몸싸움에서 도무지 질 것 같지 않다. <언힌지드>에서 그가 보여주는 완력은 어마어마하다. 물론 왕년에 한가락 했던 검투사(Gladiator)였으니 몸무게까지 힘을 보탠 그와 대적하는 건 무리겠다.
카렌 피스토리우스(Caren Pistorius, 1990년생) – 레이첼(Rachel) 역
톰 쿠퍼와 비교할 만큼은 아니지만 레이첼(Rachel)도 사는 게 영 녹록하지 않다. 아들 카일(Kyle)과 살고 있는 레이첼은 이혼한 남편과는 재산분할 소송 중이고 늘 돈에 쪼들린다. 게다가 남동생 프레드(Fred)는 변변한 직업도 없이 여자친구와 같이 레이첼의 집에 얹혀살고 있다. 낡은 자동차는 언제 고장이 나서 주행 중에 멈춰도 이상하지 않다. 그녀의 직업은 미용사인 듯하다.
어느 날 아침, 늦잠을 잔 레이첼은 허둥지둥 아들을 차에 태워 학교에 데려다주던 도중에 신호가 바뀌었는데도 출발하지 않는 앞 차에 경적을 울린다. 하필이면 그 차가 바로 분노가 극에 달해있는 톰의 차였고 레이첼은 인생 최악의 하루를 맞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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