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십여 년이 훌쩍 지난 예전 일이다. 불행은 어깨동무를 하고 연달아 찾아온다고 했던가. 참기 힘든 일이 계속해서 내게 찾아온 적이 있다. 속이 너무 시끄러워서 자다가 벌떡 일어나기도 했고, 도통 입맛이 없어서 밥알이 모래를 씹는 기분이 이런 거라는 걸 처음 느끼기도 했다. 한 끼에 밥 반 공기를 채 먹지 못해서 살이 예쁘게 쏘옥 빠졌다. 가장 힘들었던 건 명치 부분에 큰 납덩이가 얹혀 있는 듯한 답답함이었는데 결국 신경정신과의 문을 열고 들어가야만 했다.
의사는 간단한 문진을 통해 내게 화병과 우울증이라는 진단을 내렸고 더욱 확실한 진단을 위해 이름도 생소한 어떤 전문검사를 받아보지 않겠느냐 권했다. 하지만 검사 비용도 터무니없이 비쌌고 별로 신뢰가 가지 않아 거절했다. 나는 처방받은 약을 받아들고 병원을 나섰다. 신경정신과는 의약분업의 예외 지역이라 다른 약국에 들르지 않고 바로 약을 받아서 나올 수 있다는 점은 썩 마음에 들었다.
의사가 처방해준 약은 답답한 속을 가라앉힐 안정제와 우울증약 프록틴(Proctin)이었다. 약간 실망했다. ‘행복을 가져다주는 약’으로 소문난 오리지널 항우울제 프로작(Prozac)을 먹어보고 싶었는데 싸구려 카피약 프록틴이라니.
안정제의 효과는 뛰어났다. 온종일 몸이 추욱 늘어져서 명치를 짓누르는 느낌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며칠이 지난 후에는 프록틴만 복용했다. 항우울제의 특성상 한 달 이상을 꾸준히 복용해야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했다. 중간에 멈추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니 꾸준한 복용을 강조했다. 약을 받으러 한 달에 두어 번 신경정신과에 들렀다. 정신과 의사의 지루하고 뻔한 조언이 거슬렸다. ‘시답잖은 개소리 집어치우고 빨리 약이나 내놓으라구!’ 다행히 이런 마음의 소리를 현실 세계에 내놓을 만큼 내 정신이 피폐해지지는 않았던 것 같다.
두어 달을 꾸준히 복용했지만 기대했던 효과는 없었다. 대신 비뇨기에 부작용이 생겼다. 소변을 시원하게 볼 수 없었고 발기부전이 생겼다. 결국 나는 약을 끊었고 증상은 바로 사라졌다. 그러다가 모 대학병원에서 우울증 치료 전력이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임상시험을 한다는 정보를 얻고 임상에 참여하게 되었다. 대학병원이면 뭔가 더 낫지 않을까 하는 기대, 새로운 신약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찾아갔다.
대학병원에서 준 약은 릴리(Lilly)제약의 심발타(Cymbalta)라는 이름의 약이었다. 약 이름이 재미있었다. 아수라 발발타도 아니고 심발타? 한국에 없는 신약을 먹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지만 이미 시판 중인 약이었고 한국어 패키지까지 예쁘게 만들어져 있었다. 아마도 그 대학병원에서는 심발타를 처방한 경험이 없어서 임상 대상을 모집한 듯했다. 하지만 그 약은 나한테 더 맞지 않았다. 안정제와 프록틴의 부작용을 모아 놓은 듯 온종일 몸은 축 늘어졌고 다시 발기부전과 배뇨장애가 왔다.
나는 그 이후에 더 이상 항우울제를 먹지 않았다. 우울감을 가져다준 근본적인 원인이 사라지지 않는 한 약물은 내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어쩌면 우울증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냥 핑계 김에 우울증 약을 한번 먹어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우울한 기분을 극복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권하는 것 중에 대표적인 두 가지가 있다. 여행하기와 새벽시장 가 보기. 그래서 나는 여행을 선택해 보았다. 아름다운 대자연을 바라보며 에너지를 얻고 나 자신을 다시 들여다보면 기분이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 보았다. 여행을 좋아하지 않았음에도 꽤 여러 군데를 쏘다녔다. 새벽에 오들오들 떨며 일출이 아름답다는 곳에서 해가 떠오르기를 기다렸고, 배를 타고 해안선 일주를 했고, 한적한 바닷가를 거닐었고, 전망이 좋다는 호텔에서 묵었고, 새빨간 단풍이 가득한 관광지를 돌아다녔다.
여행을 다녀온 후에 내가 느낀 점은, 역시 나는 여행 체질이 아니라는 거였다. ‘우리는 여행을 통해 반복되는 일상과 친숙한 환경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들의 문화와 규범을 경험함으로써 나의 편협한 시야를 넓히고 인생을 바꿀 수 있다’고 달콤하게 속삭이는 낭만주의적 소비지상주의의 허상을 느꼈을 뿐이었다.
그리고 새벽시장 가 보기. 나는 새벽시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을 보며 에너지와 힘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을 들으면 갸우뚱하다.
어릴 때 재미있게 읽은 어린이용 명랑소설 중에 최요안 작가의 <개구장이 나일등>이라는 소설이 있다. (‘개구쟁이’가 맞춤법에 맞지만 당시에는 ‘개구장이’라고 했다) 기억에 흐릿하지만 이 소설에 인상적인 장면이 나온다. 나일등은 공부에는 관심이 없는 아이였지만 어떤 이유로 갑자기 공부에 재미를 붙이게 된다. 공부 잘하는 친구와 경쟁이 붙어서 밤늦게까지 공부에 매달린다. 친구가 몇 시까지 공부한다는 말을 듣고는 그보다 늦게까지 공부해야 이길 수 있다는 생각에 시간을 점점 늘리다가 급기야 밤을 꼬박 지새우고 코피가 터져버린다. 현명한(?) 나일등은 이런 공부 경쟁이 부질없다는 걸 깨닫고 다시 예전의 생활로 돌아간다.
나는 근면과 노력을 지나치게 칭송하는 사회 분위기에 거부감이 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부지런히 열심히 노력하는 게 옳다’는 명제는 그렇지 않은 사람을 불편하게 만든다. 현대인은 이미 지나치게 부지런하다. 수렵채집 시절 수십만 년 동안 인간은 하루 몇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다. 인간은 부지런히 일하는 것에 아직 적응하지 못한 상태지만 어쩔 수 없이 일해야 한다. 남들보다 잘살기 위해 잠을 줄이고 여가를 포기하면서 일한다. 내가 노력한 만큼 사회 전체의 재화가 늘어나면 이상적이겠지만 현실은 서로가 서로의 것을 누가 더 뺏고 빼앗기느냐의 제로섬 게임(Zero-sum game) 같다.
24시간 문을 여는 상점들이 넘쳐나는 세상, 잠을 줄이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세상, 남들보다 더 부지런하고 독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 그래서 나는 새벽시장에 가면 섬뜩하다. 그들이 내뿜는 에너지에서 삶의 활력을 느끼기보다는 그들의 피곤한 얼굴과 날 선 치열함이 보인다. 이 제로섬 게임에서 반드시 승리하여 사회에서 낙오되지 않겠다는 처연함이 느껴진다.
OECD 자살률 1위의 국가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는 한국에서 사는 사람들은 사회의 ‘표준집단’에 속해 있어야 한다는 열망이 너무 강한 듯하다. 그런데 그 ‘표준’의 기준이 지나치게 높고 좁게 설정되어 있다. 마땅히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한다는 조건도 너무 많다. 학력, 직장, 집, 차, 결혼, 배우자, 자녀, 건강, 취미 생활, 롱패딩에 이르기까지 어느 한 가지라도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면 낙오되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낙오자로 낙인찍힌 사람에게는 노력이 부족했다는 선고를 내리고 그들을 불쌍하게 여기며 나는 아직 표준집단에 속해 있다고 생각하며 안심한다.
우울감에 빠져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주변에 있을 것이다. 나도 한때 그랬던 적이 있으니까. 이는 사회가 만든 표준집단의 허상 때문에 받는 박탈감이 원인인 경우가 많다. 그들에게 따뜻한 관심은 분명 위로가 된다.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것도 좋다. 대부분 조금만 잘 버티면 어떤 방식으로든 삶이 나아질 수 있는 희망이 있다. 그걸 아직 찾지 못했을 뿐이다. 물론 죽는 게 사는 것보다 더 나은 듯이 보이는 사람도 분명 있다. 하지만 정말 인생은 한 치 앞을 알 수가 없다. 불치병으로 고통받는 사람이 죽음을 택한 다음 날 치료약이 등장할 수도 있다.
자살을 고민하는 사람이 앞으로도 계속 고통 속에 살아갈지, 금방 극복할 수 있을지, 아니면 너무나 한참 동안 고생한 후에 극복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안타깝지만 선택은 오롯이 본인의 몫이다.
그리고 간혹, 자신의 우울감을 지나치게 드러내는 사람도 있다. 사람들이 나를 측은하게 여기고 도와주고 관심 가져주기를 바란다. 어쩌다 한번 도움을 주면 다음부터는 도움과 관심을 당연하게 여기고 도움을 주지 않으면 서운하게 생각한다.
도움은 때로 증오심을 유발하기도 한다. 도움을 주고받는 순간 두 사람은 이제 수평적인 관계가 아니다. 도움을 받는 처지가 되면 상대적으로 낮은 위치에 서게 된다. 자존감이 센 사람이 아니라면 도움을 받는 자신의 상황에 거부감을 느끼게 되고 자기도 모르게 도움을 준 사람에게 원인을 돌리게 된다. 그리고 증오한다. ‘넌 나에게 굴욕감을 줬어.’라고 생각하면서.
정말 우울한 사람은 자신의 감정을 잘 드러내지 못한다. 아주 친한 사람에게만 언뜻 내비치는 경우가 많다. 아무리 친해도 그들이 내보내는 SOS 신호를 알아듣기가 쉽지 않다. 별로 친하지도 않은데 대놓고 우울감을 드러내는 사람은 감정 과잉이거나 습관성일 경우가 많다. 그런 사람에게 도움을 줘 봐야 별 무소용이다. 물론 예외도 있겠지만. 도움을 주는 건 좋지만 정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인지 잘 파악해서 신중하게 하는 게 좋겠다.
세상살이가 여러모로 참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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