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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Story

지하철의 족제비

by 나무전차 2020. 10. 26.

아침의 출근 지하철을 이용하는 직장인들은 지하철 타기의 달인들이다. 극한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출근길 러시아워의 터질 듯한 인파 속에서도 그들은 오랜 시간 쌓아온 많은 경험을 바탕으로 어떻게 해야 가능한 한 서로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신속하고 별 탈 없이 지옥철을 빠져나와야 하는지에 대한 방법을 잘 알고 있다.

 

지하철 역사 내부를 걸어가는 동안에는 우측통행을 철저히 지켜서 서로의 동선이 엉키지 않게 하고, 열차 출입문 앞에서는 문 양쪽으로 가지런히 두 줄 서기를 하고 있다가 문이 열리면 열차 안에 있는 사람이 완전히 다 내릴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린 다음에 올라탄다.

열차 안에서는 타고 내리는 사람을 방해하지 않도록 내리는 문 앞에 서 있지 않는다. 만일 미처 열차 안쪽에 자리를 잡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내리는 문 앞에 서게 된다면 내리는 사람에게 방해되지 않게 잠깐 내렸다가 다시 올라타는 센스를 발휘하기도 한다.

또 운이 좋게도 좌석에 앉은 사람은 엉덩이를 깊숙이 의자에 붙여서 서 있는 사람의 공간을 최대한 확보할 수 있게 해 주고, 몰지각하게 다리를 꼬거나 다리를 벌리고 앉아서 앞에 서 있는 사람과 옆에 앉은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출근 시간 동안만큼은 이렇게 유기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마치 거대한 하나의 생명체처럼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간혹 이런 불문율을 어기고 나만의 길을 가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꽤 오래전 일이다. 출근 지하철에서 매일 마주치는 남자가 한 명 있었다.

출근 시간에는 일정한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보게 되는 사람이 꼭 한두 명 있는데 그 역시 그런 사람 중의 한 명이었다. 나이는 한 40대 초중반 정도 되어 보였고 보통보다 작은 키에 마르고 왜소한 체격이었다. 기본적인 면바지에 넥타이를 매지 않은 셔츠, 그리고 잠바나 캐주얼 재킷 정도의 편한 차림새와 풍기는 분위기로 보아 공무원이나 그다지 격식이 필요 없는 작은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는 도수 높은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높은 도수 탓에 안경 렌즈 속으로 보이는 게슴츠레하게 뜬 눈은 더욱 가늘고 작게 보였고 머리에는 젤을 약간 과도하게 발라 넘겨서 우스꽝스럽게 번들거렸다.

 

전체적으로 그의 인상은……결코 좋은 편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나는 그를 처음 보자마자 ‘족제비’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항상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가뜩이나 왜소한 체격이 더욱 작아 보이게 몸을 웅크린 채 고개를 약간 앞으로 빼고 마치 굽실거리듯이 자꾸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걸었다.

그가 그렇게 주위의 눈치를 계속 살펴야 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그를 매일 아침 보게 되는 곳은 신도림역 2호선이었다. 지금도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당시 출근 시간 신도림역에는 강남역 방향으로 갈 때 빈 차로 출발하는 열차가 두 대에 한 대꼴로 있었다. 지옥철로 악명이 높은 강남역 방향 2호선 출근 시간에 좌석에 앉아 갈 수 있다는 건 정말 큰 행운이었다.

그래서 시간이 아주 급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빈 열차에 타기 위해 사람이 가득 찬 열차는 그대로 보내고 줄을 선 채로 다음 열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나 또한 될 수 있으면 빈 열차를 기다려서 타고 갔다.

 

족제비 같은 인상의 이 남자 역시도 항상 빈 열차를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줄을 서는 법이 없었다.

도수 높은 안경 렌즈 때문에 더욱 작아 보이는 눈을 희번덕거리며 두 손을 주머니에 꽂은 채 주위의 눈치를 슬슬 살피면서 천천히 어슬렁거리다가, 빈 열차가 도착해서 문이 열리면 갑자기 속도를 내고는 줄 서 있는 사람들 앞으로 새치기해서 가장 먼저 열차에 올라탔다.

그는 당연히 빈 좌석에 앉을 수 있었고 자리에 앉자마자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나는 그에게 ‘지하철의 족제비’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그런데 족제비는 정말로 모르는 눈치였다. 자신의 행동이 유기적으로 얽힌 이 거대 생명체 안에서 얼마나 반역적이고 튀는 행동인지를. 나뿐만 아니라 근처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의 행동을 다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는 정말로 너무 눈에 튀었다. ‘지하철의 족제비’는 스스로 약삭빠르다는 착각 속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족제비의 새치기가 매번 성공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마도 족제비의 파렴치한 행동에 대해 모두들 벼르고 있었던 듯하다. 어느 날 아침 출근 시간이었다. ‘지하철의 족제비’는 그날도 어김없이 어슬렁거리면서 눈치를 보다가 새치기를 시도했다.

하지만 이번엔 임자를 제대로 만났다. 족제비는 제일 앞에 줄을 서 있던 정장 차림의 건장한 남자에게 목덜미를 잡혀서 뒤로 사정없이 내동댕이쳐지고 말았던 것이다. 족제비를 집어던진 정장맨은 족제비가 자기 앞으로 오기를 내심 기다리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의 동작은 신속하고 간결했다.

 

그 순간 내 귀에는 모든 장면을 함께 지켜보던 사람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다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정장맨의 행동에 통쾌함을 느끼고 있음이 분명했다. 반역자 족제비는 그렇게 처단되었다.

 

그날 이후로 족제비의 모습은 눈에 띄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