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속을 거닐면 참으로 이상하다.
덤불과 돌은 모두 외롭고,
수목들도 서로가 보이지 않는다.
모두가 다 혼자이다.
나의 생활이 아직도 밝던 때엔
세상은 친구로 가득하였다.
그러나 지금 안개가 내리니,
누구 한 사람 보이지 않는다.
모든 것에서, 어쩔 수 없이
인간을 가만히 떼어놓는
어둠을 전혀 모르는 사람은
정말 현명하다 할 수 없다.
안개 속을 거닐면 참으로 이상하다.
살아있다는 것은 고독하다는 것,
사람들은 서로를 알지 못한다.
모두가 다 혼자이다.
나는 시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시에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않는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하겠다. 노래를 들을 때도 멜로디만 즐길 뿐 노랫말은 도통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시보다는 편하게 줄줄 읽어 내려갈 수 있는 산문이 좋다. 화려한 수사가 많은 글보다 담담하게 쓴 글이 좋다. 소설도 헤밍웨이의 작품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건조한 하드보일드 문체로 쓴 소설을 선호한다.
그런데도 ‘안개 속에서’는 보는 순간부터 좋았다. 이 시를 처음 보게 되었을 때는 내가 30대 초반 무렵이었다. 차분하고 여유로운 분위기의 휴일 낮이었던 것 같다. 나는 시원한 물을 꺼내 마시려고 냉장고 문을 열다가 냉장고 문에 자석으로 붙어있던 작은 종잇조각을 발견했다. 이 시는 그 조각에 작은 글씨로 인쇄되어 있었다.
엄마는 가끔 신문에 좋은 글이 있으면 스크랩해서 냉장고에 붙여 놓는 습관이 있었다. 아마 그즈음 구독하던 신문에 ‘금주의 명시’ 같은 코너가 있었던 거 같다. 그날 이후에도 가끔 다른 시가 냉장고에 붙었지만 다른 시는 내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다.
가끔 이 시가 떠오를 때가 있다. 지금처럼 여름에서 선선한 가을로 넘어갈 때나 기분이 가라앉을 때 주로 생각난다. 그러면 인터넷을 뒤져본다. 독일어로 쓴 시이다 보니 번역이 제각각 다른 ‘안개 속에서’가 주르륵 뜬다. 하지만 구관이 명관이라 했던가. 내가 처음 봤던 번역이 역시 제일 마음에 든다.
이 시를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서늘한 공기를 마시며 짙은 안개 속을 걸어보고 싶어진다. 신비롭고 포근한 느낌이 가득한 짙은 안개 속을 혼자 걸으면 이상하지도, 외롭지도, 고독하지도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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