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순정만화의 불후의 명작, 신일숙 작가의 <아르미안의 네 딸들>을 보면 다음과 같은 장면이 나온다.
우리의 주인공인 운명과 싸우는 전사 - 넷째 딸 샤르휘나는 어느 날 셋째 언니 아스파샤의 운명의 상대라고 확신했던 남자 페리클레스의 주검을 발견한다. 운명의 상대가 죽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므로 샤르휘나는 미래의 형부인 페리클레스를 살려내기로 마음먹는다.
이미 죽은 자를 다시 살리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명부[冥府]에 직접 가서 죽음의 신에게 죽은 자의 영혼을 돌려받아야 한다. 하지만 죽음의 신이 순순히 영혼을 내어줄 리 만무하다. 샤르휘나는 전쟁과 파멸의 신 에일레스에게 도움을 청하고 함께 명부에 가서 죽음의 신과 일전을 벌인다.

죽음의 신과 싸우던 중에 기묘한 안개가 덮쳐온다. 에일레스는 다급한 목소리로 샤르휘나를 향해 경고한다.
“꼬마, 조심해라! 이것은 보통 안개가 아니다. 인간만이 사로잡히는 죽음의 향훈(香薰)이야! 절대로 죽음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죽음의 향훈에 빠져든 샤르휘나는 환상에 사로잡힌다. 환상 속에서 샤르휘나는 돌아가신 엄마의 따뜻한 품에 안긴다. 엄마의 부드러운 목소리, 그리웠던 엄마의 냄새를 맡으며 행복감에 도취된다. 그리고 서서히 졸음이 밀려온다. ‘그래, 이대로 이렇게 엄마 품에서 잠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렇게 달콤한 졸음 같은 죽음이라면…죽어도 좋아.’ 샤르휘나는 이런 생각에 빠지며 서서히 힘을 잃는다.
[내 기억 속의 죽음]
내 기억 속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죽음의 이미지는 내가 채 열 살이 되기도 전에 TV에서 본 어떤 한국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드라마인지도 모르겠다. 어떤 젊은 여자가 가슴에 칼이 꽂힌 채 쓰러져 있다. 칼이 꽂힌 지점에서 흘러나온 선홍색 피는 하얀 옷을 흥건하게 적시고 바닥까지 흘러나와 있다.
분명 흑백 TV로 본 장면이었을 텐데 이상하게 내 기억에는 화사한 붉은색으로 남아있다. 여자의 몸엔 아무런 미동도 없다. 카메라는 여자의 얼굴을 클로즈업한다. 눈부시게 창백한 피부, 어딘지 모를 허공을 응시하며 크게 뜬 눈, 살짝 벌린 입가에도 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다.
죽은 시체를 연기하고 있었으니 당연하겠지만 여자는 신기하게도 전혀 눈을 깜박이지 않는다. 초점 없이 흐릿한 여자의 큰 눈동자는 어딘지 모르게 쓸쓸해 보인다. 카메라는 천천히 줌 아웃이 되면서 한 남자가 여자의 주검 위에 계속 무언가를 덮는 장면을 보여준다. 창호지를 바른 문짝이었던 것 같다. 남자는 여자의 다리를 덮고 팔을 덮고 가슴을 덮고 마지막에 얼굴을 덮는다.
하지만 여자의 얼굴을 가린 문짝에는 절묘한 위치에 구멍이 나 있어서 부릅뜬 눈이 끝까지 가려지지 않는다. 그리고 엔딩 자막이 올라간다. 꽤 긴 롱 테이크 장면이었는데도 여자의 눈은 전혀 떨림이 없었다. 나는 그 장면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꼈다. 정말 아름다웠다. 그것이 내가 처음 인지한 죽음의 이미지다. 어쩌면 나에게 네크로필리아 기질이 살짝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 나는 공책 제일 뒷장에 기억 속에 남은 그 이미지를 그렸다. 눈을 부릅뜬 채 쓰러져 있는 여자의 모습을 그리고 몸통에 칼을 꽂았다. 물론, 온몸을 적시는 피는 가장 예쁜 빨간색으로 칠했다. 입가에 흐르는 피도 잊지 않았다. 나는 그 그림을 자랑스럽게 엄마한테 보여 주었다. 그리고 나는 전혀 예상치 못한 엄마의 반응에 놀랐다. 엄마는 내가 그린 그림을 보고 엄청나게 당황하는 것 같았다. 엄마는 내게 왜 이런 그림을 그렸는지 묻지도 않고 꾸중을 하지도 않았지만 내가 보는 앞에서 그림을 찢었다.
나는 엄마의 행동을 보고 내가 그린 그림이 뭔가 대단히 잘못된 것임을 깨달았다. 내가 아름답다고 느꼈던 죽음의 이미지는 엄마에게는 무척 부정적인 거였다. 나는 다시는 그런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죽음의 이미지는 내게 늘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우리 집에는 미국 사진 잡지사 LIFE에서 출판한 사진집이 몇 권 있었다. 나는 그중에서 <LIFE at War>라는 사진집을 즐겨 보았다.

사진집에는 종군기자들이 촬영한 실제 전쟁의 모습들이 담겨 있었다. 전쟁의 모습을 담은 사진 속에는 당연히 죽음이 있었다. 머리가 잘린 채 반쯤 불에 타서 얼굴이 녹아내린 일본군, 무릎이 꿇리고 눈이 가려진 미군 옆에 시퍼렇게 날이 선 일본도를 높이 들고 미군의 목을 베기 직전의 일본군의 모습, 철조망을 뚫고 지나가려다가 사살당한 미군, 수용소를 탈출하다가 총격을 받고 나무 위에 떨어져서 날카로운 나뭇가지에 온몸이 관통된 전쟁포로, 집단으로 학살당한 민간인들 – 특히 집단으로 학살당한 민간인들의 모습엔 이상한 공통점이 있었는데 그들 중 꽤 많은 사람이 하의가 벗겨진 채 엉덩이와 치부를 드러내고 있었다. 왜 이들의 아랫도리가 벗겨져 있는 것일까?
그 궁금증은 나중에 <마루타 (1988년작)>라는 소설을 보고 약간 풀리게 되었다. 731부대에서도 나치 수용소와 마찬가지로 독가스로 사람을 죽이는 실험을 했다. 그런데 독가스를 맡고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순간에 사람들은 갑자기 성행위라도 할 듯이 하의를 벗고 서로에게 엉키기 시작하더라는 것이다. 책에서는 그 이유를 인간의 종족번식 본능이라고 설명했다. 죽임을 당하기 전에 유전자를 퍼뜨리려는 생명의 본능 - 후손을 퍼뜨리는 행위를 통해 영원한 생명을 이어가고자 하는 생물체의 본능이라는 거였다. 그럴듯한 설명이었다.

그리고 TV에서도 실제 죽음을 볼 수 있었다. 당시 TV에서는 무장공비를 사살했다는 뉴스가 가끔 나오곤 했다. 사살당한 무장공비의 시신을 옷을 홀딱 벗긴 채로 거적때기 위에 엎어놓고 촬영한 장면을 아무런 여과 없이 그대로 방송했다. 지금 같으면 절대로 방송할 수 없는 장면이다. 반공이 국시였던 시절이라 가능했을 것이다.
군인처럼 짧은 머리가 아니라 그때 유행하던 덥수룩한 더벅머리를 하고 희멀건 엉덩이를 고스란히 드러낸 채 엎드려 있는 무장공비의 주검은 춥고 무섭고 슬펐다. 전혀 아름답지 않았다. 내게 죽음의 이미지는 점점 부정적인 것으로 변해갔다.
[죽음의 향훈(香薰), 그리고 죽음의 시뮬레이션]
하지만 내 마음속에는 여전히 처음 인지했던 아름다운 죽음의 이미지가 사라지지 않고 있었던 것 같다. 오래전에 외할머니가 노환으로 고생하실 때 병원에 급하게 모시고 가야 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외할머니 댁의 사촌 동생들은 아직 어렸고 차가 있는 내가 그 일을 맡았다. 마침 직장을 그만두고 쉬고 있었던 때라 어렵지 않았다. 어느 날 할머니를 급하게 병원에 모셔야 한다는 연락이 왔다. 나는 엄마를 옆에 태우고 할머니 댁으로 향했다.
그런데 갑자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그날따라 눈 내리는 모습이 정말 아름다웠다. 차가운 겨울바람에 흩날리는 눈송이는 가로수에 살며시 쌓이면서 아름다운 눈꽃을 만들었다. 엄마와 나는 할머니의 위급한 상태도 잊은 채 아름다운 모습에 취해 카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아무런 말도 없이 드라이브를 즐겼다. 선곡은 엄마가 좋아하는 락 발라드 위주로 틀었다. 그때 들었던 곡 중에 제일 기억나는 건 레인보우의 ‘The Temple Of The King’이다. 흐리고 눈 내리는 날에 썩 잘 어울리는 곡이다.
그날이 내가 할머니를 병원에 모신 마지막 날이었다. 나는 그날 이후 눈이 예쁘게 내리는 겨울날에는 할머니의 죽음을 떠올린다. 눈이 내리고 코끝이 싸하게 추운 겨울날에는 죽음의 냄새가 풍긴다. 하지만 죽음의 냄새라 해서 무섭거나 슬픈 부정적인 느낌은 아니다.
내게 죽음의 신의 이미지는 커다란 낫을 든 해골의 모습이 아니라, 눈부시게 하얗고 아름다운 눈의 여왕이고 죽음의 냄새라기보다는 죽음의 향훈(香薰)이다. 언젠가 차갑고 아름다운 눈의 여왕이 죽음의 향훈(香薰)을 풍기면서 내게 다가올 것 같다. 나는 눈의 여왕의 품에 안겨 달콤한 졸음이 밀려오는 것처럼 서서히 찾아오는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아르미안의 네 딸들>의 샤르휘나처럼 죽음의 신과 싸울 생각은 전혀 없다.
한때 죽음을 동경한 적이 있다. 나이를 먹을수록 주변 상황에 억압받는 내 모습이 싫어질 때가 많았다. 나 스스로, 내 자유의지로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짜증 나기도 했다. 나는 충분히 자유롭지 못한 것 같았다. 내가 삶에서 진정으로 자유로워지는 순간은 생명을 유지하려는 기본적인 본능을 거부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순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죽음이 내게 다가오는 과정을 상상하며 눈을 감고 시뮬레이션해보기도 했다.
나는 내 목에 끈을 감고 매달린다. 끈은 적당히 두껍고 튼튼하다. 끈이 점점 목을 조여 온다. 숨이 막히고 이마에는 핏대가 선다. 두뇌에 산소공급이 막히면서 내 의식은 희미해진다. 그리고 마침내 내가 원하던 죽음의 향훈(香薰)을 맡게 된다. 그런데……내가 바라던 죽음이 아니다. 달콤한 졸음처럼 다가오는 죽음이 아니다. 아름답고 차가운 눈의 여왕은 나타나지 않는다. 죽음은 저 깊고 음습한 바닥에서 스멀스멀 기어 올라온다. 죽음은 눈부시게 하얀색이 아니라 탁한 회색빛이고, 향훈(香薰)이 아닌 썩은 시궁창 냄새가 난다. 그리고 무섭다. 두려워진다. 결국 나는 죽음의 시뮬레이션을 멈출 수밖에 없다.
왜일까? 대체 왜 죽음은 이토록 부정적인 느낌으로 다가올까? 나는 사회화 과정에서 주입받은 죽음의 이미지를 왜 극복하지 못하는 것일까?
오래전, 나는 종로의 가라오케 바에서 우연히 대학 후배를 만난 적이 있다. 많이 친한 편은 아니었지만 가끔 술 한잔 정도는 같이 하는 후배였다. 후배는 뜬금없이 내게 말했다.
“형, 오랜만에 봤는데 이따가 같이 술 한잔 할래요?”
늘 주변에 사람들로 가득했고 나에게 먼저 술을 마시자고 한 적이 없는 후배였기 때문에 약간 이상하긴 했다. 평소의 활기찬 모습에 비해 어쩐지 풀기가 없어 보이기도 했다. 나는 다음에 하자고 거절했다. 그리고 다음 주에 그 후배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사인은 심장마비라고 했다. 하지만 그가 콘도를 예약하고 차를 렌트해서 혼자 여행을 떠난 날에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번개탄을 챙겨 갔다는 사실도.
나는 아직도 생각한다. 그날 그 녀석과 같이 술을 마셨다면 상황이 좀 달라졌을까? 뭔가 이야기하고 싶어하던 그 물기 어린 눈빛을 내가 눈치챘다면 결과는 바뀌었을까?
어느 토요일 낮, 초등학교 동창(남)한테 전화가 걸려왔다. 같이 한잔하자며 나오라는 전화였다. 그리고 다른 친구(여)를 바꿔주었다. 친구는 나보고 빨리 나오라고 재촉했다. 보고 싶다는 말과 함께. 난 초등학교 시절 그 친구에 대한 기억이 없다. 얼굴을 본 건 예전 동창 모임 때 한 번뿐이고 그때도 한두 마디 말해본 게 다였다. 아니나다를까, 술자리에 나가보니 그 친구는 지난번에 나를 본 사실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친구는 그저 한사람이라도 술자리에 더 나오기를 바랐던 것 같았다. 그리고 그날 자기의 옆자리가 비어있는 것을 유독 싫어하는 듯했다. 그 친구와 나 사이에 다른 친구가 앉아있었는데 걔가 화장실에 가면서 자리를 비울 때마다 계속 나보고 옆에 와서 앉으라고 말했다. 하지만 난 자리를 옮기는 게 번거로워 옆에 앉지 않았다. 그리고 친구는 술자리 내내 같은 말을 여러 번 반복했다.
“우리, 앞으로도 계속 친하게 지내자!”
며칠 후, 그 친구의 사망 소식이 들려왔다. 사인은 역시 심장마비였다. 물론 친구들 중에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난 알았다. 앞으로도 계속 친하게 지내자는 말은 나한테 한 말이 아니었다.
아마도 그건……세상에게 한 말이었을 것이다.
나는 궁금하다. 내가 그날 친구의 옆자리에 기꺼이 앉았다면 상황이 좀 달라졌을까? 뭔가 이야기하고 싶어 하던 – 세상과 소통하고 싶어 하던 그 물기 어린 눈빛을 내가 눈치챘다면 좀 바뀌었을까?
그리고 궁금하다. 대학 후배와 초등학교 동창, 그 두 사람에게 죽음의 순간은 어떤 모습으로 다가왔을까? 그들은 내가 바라던 것처럼 죽음의 향훈을 맡고 차갑고 아름다운 눈의 여왕의 키스를 받았을까? 아니면 내가 행한 죽음의 시뮬레이션처럼 음습하고 탁한 죽음을 느꼈을까?
하지만 나는 믿고 싶다. 죽음은 우리가 배워온 차갑고 어둡고 두려운 존재가 아니라고. 그들의 죽음의 순간에 동화 같은 눈의 여왕이 나타나지 않았다 해도 찬란한 빛이 빅뱅의 순간처럼 폭발했을 거라고. 그들의 죽음의 순간에는 찬란한 빛과 함께 새로운 우주가 탄생했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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