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기억력에 자신이 많은 편이다. 영어 단어나 수학 공식 등을 잘 외우는 학습 기억력이라면 인생살이에 큰 도움이 되었겠지만 아쉽게도 그런 기억력은 아니고 과거에 있었던 어떤 상황에 관련한 기억이다. 생활 속에서 내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면서 경험한 오감 기억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군가와 만나서 예전 이야기를 하다 보면 내가 그들의 기억 오류를 많이 수정해주곤 한다.
한번은 <감각의 제국(In the Realm of the Senses), 1976년>이라는 영화 이야기를 하다가 상대와 의견이 엇갈렸던 적이 있다.

여기서 코리다(corrida)는 투우(鬪牛)라는 뜻이다. 투우 경기처럼 격하고 위험한 사랑이라는 뜻일까? 포스터 하단 중앙에 큰 뿔을 가진 황소 실루엣이 보인다.
1980년에 <감각의 제국>의 일본어판 제목 발음을 그대로 차용한 ‘아이노 코리다(Ai No Corrida)’라는 노래가 영국 가수에 의해 발표되었고 이 곡을 1981년 미국의 퀸시 존스(Quincy Jones)가 디스코 버전으로 프로듀싱하여 재발매하는데 세계적으로 크게 히트한다. 들어보면 귀에 익을 것이다.
<감각의 제국>은 남녀의 변태적인 육체적 사랑을 다룬 영화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는 여자가 남자를 교살하고 중요 부위를 자르는 장면이 있다. 그런데 이 장면에 관한 기억이 상대와 달랐다. 나는 칼로 잘랐다고 기억하고 있었지만 상대는 가위를 썼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내기를 했고 물론 내가 이겼다.
하지만 이렇게 확실한 증거가 남아있지 않은 경우에는 난처한 상황에 빠지기도 한다. 오래전에 소개팅을 주선한 적이 있다. 내 앞가림도 못 하는 처지에 왜 그런 일을 벌였는지 잘 모르겠다. 어쨌든 소개팅 당사자 두 명, 나, 그리고 지인 한 명을 추가하여 모두 네 명이 모였다. 소개팅 장소는 종로3가역 5번 출구 근처 2층에 있는 카페 같은 분위기의 살짝 오래된 듯한 술집이었다.
그곳은 의자와 테이블이 규칙적이고 일정한 모양으로 배치되지 않고 자리마다 달랐다. 안쪽에는 칸막이를 높게 설치해서 프라이버시를 지킬 수 있는 안락한 공간도 있었다. 직물로 된 두툼하고 푹신한 의자에는 역시 두툼한 쿠션이 여러 개 놓여 있었다. 관리가 어려운 직물이기도 하고 오래된 업소라 그런지 살짝 퀴퀴한 냄새도 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실내에 자리를 꽤 차지하고 있던 검정 그랜드 피아노였다. 의외로 소개팅은 실패였고 두 사람은 그렇게 한번 만나고 헤어졌다.
그리고 시간이 꽤 흐른 후에 우연히 그때 소개팅했던 멤버가 다시 모이게 된 적이 있다. 그런데 나만 빼고는 세 명 모두 소개팅했던 사실을 기억조차 못 하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그때는 데면데면했던 소개팅 당사자 두 사람이 이번에는 서로 호감을 표시하기까지 했다. 나는 그들에게 그날의 기억을 되살리려 애써 보았지만 그들의 기억은 돌아오지 않았다. 답답했다. 나는 잠시 내가 꿈을 꾼 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주위 사람들이 공모하여 한 사람을 미친 사람으로 몰아가는 스릴러 영화의 피해자가 된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다가 또 한참 시간이 지나고 그들 중 한 명과 다시 이 이야기를 꺼낼 때가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소개팅한 기억이 난다고 했다. 정말 기억이 나는 건지, 내가 그의 기억을 조작하는 역할을 한 건지는 잘 모르겠다. 참 묘한 경험이었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Bohemian Rhapsody), 2018년>에는 1985년에 있었던 라이브 에이드(Live Aid) 공연 장면이 나온다. 나는 어릴 때 그 공연을 TV로 봤던 기억이 있다. 마돈나를 좋아했기 때문에 라이브 에이드 공연하면 마돈나의 공연 장면이 먼저 떠오른다. 나는 마돈나의 노래 중에서 ‘Holiday’를 가장 좋아한다. 라이브 에이드에서도 이 노래를 불렀다.
내 기억 속 마돈나는 댄스머신답게 ‘Holiday’를 부를 때에도 탬버린을 치면서 격한 춤을 추었다. 마돈나의 라이브 공연을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라이브 목소리가 녹음된 목소리와 달라서 좀 실망했던 기억이 난다. 아무래도 춤을 추면서 라이브 공연을 하는 게 힘들었겠지만 너무 헐떡인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마돈나는 가창력보다는 퍼포먼스로 승부하는 가수이므로 나중에는 기대치를 낮추고 보게 되었다.

나는 영화 <보헤미안 렙소디>를 보고 유년 시절의 추억을 소환하는 마돈나의 라이브 에이드 공연을 유튜브로 찾아보았다. 보고 싶은 공연을 바로 찾아볼 수 있는 유튜브는 정말 멋진 공간이다.
그런데, 이상했다.
분명 내 기억엔 탬버린을 치면서 ‘Holiday’를 불렀는데 노래가 끝날 때까지 마돈나는 탬버린을 들지 않는 거다. 노래 중반부터 백댄서 두 명이 탬버린을 들기는 한다.
그런데 라이브 에이드 마돈나 공연에 ‘Into The Groove’와 ‘Love Makes The World Go Round’라는 노래를 부르는 영상이 더 있었다. 그 동영상을 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 마돈나가 탬버린을 들고 춤추는 것이 아닌가! 분명 내 기억엔 ‘Holiday’였는데 말이다. 이건 완벽하게 내 기억의 오류였다.
내 뇌세포는 마돈나가 ‘Holiday’, ‘Into The Groove’ 그리고 ‘Love Makes The World Go Round’ 세 곡을 부르는 장면이 섞여서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낸 것이다.
나는 이 사건 이후로 내 기억력에 대한 자신감을 잃었다. 기억은 정말 믿을 만한 게 못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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