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즘 들어 부쩍 사는 게 권태로워요. 바쁘게 길을 걸어가다가도 어느 순간 멍해지면서 ‘내가 왜 지금 이 길을 걸어가야 하지?’라는 생각이 들고, 배가 고파서 밥을 먹다가도 숟가락질이 귀찮아지면서 잠시 상념에 빠지죠. ‘이거, 꼭 먹어야 하나?’ 가끔 지인들과 술을 마시는 게 유일한 낙인 거 같아요.
생각해보면 아주 어릴 때부터 공상에 빠지는 걸 좋아했던 거 같아요. 수업시간에도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는 걸 좋아했죠. (덕분에 약간 안면 비대칭이 생기고 말았지만요) 그래서 운이 좋게도 창가에 앉게 되면 수업에 집중할 수 없었어요. 친절한 선생님은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수업에 집중하지 않는 불량 학생으로 모는 대신에 ‘무슨 고민이 있는 거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신경을 써 주셨죠. 물론 난 그런 친절함이 우리 엄마가 갖다 드린 촌지 봉투 덕이 크다는 걸 잘 알고 있었어요.
창밖에 뭔가 특별한 볼거리가 있는 건 아니었어요. 교실 안에 갇혀 있는 듯한 답답한 느낌이 싫어서 그냥 바라보고 있었겠죠. 창밖에는 자유가 펼쳐져 있는 것 같았죠. 그렇다고 해서 일탈을 꿈꾸는 에너지 가득한 학생은 아니었어요. 어떤 날은 등교하고 자리에 앉으면 화장실도 안 가고 그날 수업이 모두 끝날 때까지 온종일 꼼짝 않고 앉아만 있기도 했어요. 움직이는 게 귀찮았거든요.
가슴이 뜨거운 사람이 부러울 때가 많아요. 특히 자기만의 일에 모든 정열을 쏟는 예술가들이 부러워요. 자부심이 강하고 때로는 독선적이고 거침없이 질주하는 그런 예술가들요. 나는 언제 저렇게 최선을 다해 열정을 쏟아부었던 적이 있었을까……? 굳이 갖다 붙이자면 살면서 딱 한 번 있었어요. 대학입시 때였죠. 꼭 그 대학을 가고 싶었어요. 사타구니에 습진이 생길 정도로 엉덩이를 딱 붙이고 집중했어요. 재수를 해야 했지만 결국 합격했죠. 참 기뻤어요. 세상을 다 얻은 것만 같았죠. 하지만 그 기쁨은 며칠 가지 않았고 난 다시 시큰둥한 몽상가로 원상 복귀했어요. 그 이후의 나의 삶은 바람에 흘러가는 구름이었어요. 새로운 목표를 찾지 못했죠. 원하는 게 없으니 이루어지는 게 없는 게 당연해요.
아니, 원하는 게 하나 있긴 해요. 내가 원하는 건 ‘자유’에요. 나는 어디에 소속되고 싶지 않아요. 누구든 어떤 집단이든 내게 명령을 내리고 나를 억압하는 걸 견딜 수 없어요. 나를 짓누르는 모든 것들에게서 벗어나 완전한 자유를 얻고 싶어요. 그런 자유란 어떤 것일지 생각해요. 그리고 결론에 다다르죠.
그래요, 나는 ‘권력’을 가지고 싶어요. 강력한 절대 권력을 가지면 참 자유로울 것 같아요.
나는 다시 몽상의 세계에 빠져요. 현실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자는 누구일까? 일단 대통령이 떠올라요.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누가 뭐래도 최고의 권력을 가진 사람임이 틀림없어요. 대통령이 되면 정말 행복할 거 같아요. 하지만 한국에서 대통령의 임기는 고작 5년에 불과해요. 인생에서 5년은 너무 짧은 시간이죠. 5년 동안 누리던 최고의 권력이 사라진다면 얼마나 허무할까요?
나의 몽상은 이제 현실 가능하지 않은 것으로 넘어가요.
북한의 김정일이 떠올라요. 한 나라의 최고 권력자의 아들로 태어나서 한평생 최고의 권력을 누리다가 천수를 다하고 세상을 떠났죠. 권력을 가지려면 그 정도쯤은 가져야 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또 생각이 바뀌어요. 그래 봐야 그는 작고 힘없는 나라의 최고 권력자일 뿐이었어요. 주변의 강대국들에 억압받았죠. 역시 내가 원하는 진정한 자유를 가진 사람은 아니에요. 그러면 누가 또 있을까요? 고대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은 어떨까요? 주변 국가 중 가장 강한 국가의 절대 권력자로 살다가 죽은 진시황이야말로 내가 바라는 진정한 자유를 얻은 사람이 아닐까요?
그런데 진시황 역시 죽음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어요. 그가 권력을 가진 기간은 너무 짧았어요. 죽음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죠. 인간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내가 바라는 진정한 자유는 가질 수 없을 듯해요. 나는 시간의 억압에서도 벗어나고 싶어요. 나를 지구 위에 묶어놓는 중력에서도 자유로워지고 싶어요. 훨훨 날아다니고 싶어요. 나는 내가 가고 싶은 곳에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바로 갈 수 있어야 해요. 나는 자연현상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도 있어야 해요. 추위나 더위에 활동을 제약받고 싶지 않아요.
그래요, 나는 신적인 존재가 되고 싶어요. 시간과 공간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요. 그쯤 되면 나를 억압하는 건 아무것도 없을 테죠. 나는 모든 걸 조종할 수 있는 존재이지 어떤 것으로부터도 조종당하지 않아요.
그런데 내가 신이 되면 나에게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을 거예요. 그들의 기도 소리가 들려요. 그들의 사연은 하나같이 구구절절해요. 나는 그들이 안타깝고 그들을 도와주고 싶어요. 물론 나는 그럴 힘이 충분히 있어요. 하지만 나는 그들을 내 힘으로 도와주는 게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아요. 나는 그들을 안타깝게 여기는 감정으로부터도 자유로워져야 해요.
신이 된 이상 내게 더는 인간적인 감정이 필요하지 않아요. 모든 감정이 사라져야 해요. 그들을 안타까워하거나 불쌍하게 여기지 않아야 해요. 신으로서의 내 의식은 이제 모든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져요. 나는 그저 모든 걸 지켜보기만 할 뿐이에요. 지구를, 태양계를, 은하계를, 모든 우주를 관찰자의 시점으로 바라보기만 해요. 그리고 영겁의 시간이 흘러요. 아니, 시간은 아무런 의미도 없어요.
나는 다시 권태로워져요. 아무런 감정도 없이 내가 만든 피조물들을 바라보다가 내 의식은 점점 소멸해요. 내게 이제는 자의식이란 건 존재하지 않아요. 나는 점점 희미하게 사라지고 완전한 무(無)가 되어 버려요. 어느 순간 TV 화면의 전원이 깜박하고 나가버리듯이 그렇게 꺼지고 말아요.
그리고 나는 마침내 내가 그토록 바랐던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게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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